[칼럼] 데카르트의 성찰과 몸 흉터치료파워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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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7 19:08:46 에 작성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표현 자체는 데카르트의 《성찰》에서는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코기토’라는 표현은 이 경구를 가리키기 위해 쓰였다. 데카르트는 그의 초기 저작에 속하는 방법서설에서 이 구 자체를 사용했는데, 후에 그는 그가 추론하려 해 왔던 내포된 의미가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왔다고 생각했고, 그에 따라 그는 “cogito ergo sum”이라는 표현을 “나는 존재한다(곧 제1의 확실한 사실)”로 바꾸었다. 내가 존재한다는 제1의 확실한 사실과 코기토라는 표현을 분리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두 번째 성찰의 시작부분에서 그는 그가 부정의 극한 지점이라고 일컫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그의 논증은 우리를 속이는 신의 존재로부터 시작한다). 데카르트는 그 부정 속에서 남아있는 것이 존재하는지를 보기 위해 그의 믿음까지도 실험(사고실험) 속에 넣어본다. 그의 존재 속 그의 믿음 속에서 그는 이것을 발견한다: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우리를 속이는 신이나 그의 근거없는 믿음을 멈추게 하기 위해 쓰인 도구인 악마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근거있는 것이다. 그가 속아넘어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 세계 안에 어떠한 것도 없다고, 하늘도, 대지도, 마음도, 신체도 없다고 나를 확신하게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나 역시도 존재할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만일 내가 나의 확실한 존재를 나에게 확신시켰다고 치자. 그래도 나를 속이는 절대 권력과 일부러 그리고 지속적으로 나를 속이는 자는 존재한다. 그러한 경우에도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속이는 자가 나를 계속 속이고 또 그가 가능한 만큼 나를 계속 속이게 한다고 해도, 내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내가 생각한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그는 결코 도출해 낼 수가 없다. 따라서 모든 것들 철저히 고려해 봤을 때, 나는 다음 명제와 같은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 “나는 존재하며, 또한 나는 존재한다.” 이 명제는 반드시 참이다. 나에 의해서건, 내 마음 속의 속이는 자에 의해서 말해지건 말이다. 중요한 주석이 두 개 필요하다. 1) 여기서 그는 오직 제1 인간의 시점에서 본 “내가 소유한” 존재의 확실성을 선언했을 뿐이다. 그는 다른 마음의 존재를 증명해내지 못했다. 이는 별도로 우리 각각에 의하여 우리 자신을 위해 사유되어야 하며,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윤리학에 대해 코기토와는 별개의 논거를 추가하여 설명을 시도한다. 2) 그는 결코 그의 존재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말했을 뿐이다: “만일 그가 생각한다면” 그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만을. 데카르트는 더 상위의 지식을 쌓기 위한 기초인 코기토 즉 제1의 확실성을 앞의 인용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코기토는 그의 믿음을 다시 세우기 위한 그의 사유 대상으로 정립된 굳건한 기반으로 쓰인다. 코기토에 대한 많은 비판이 지금까지 제기되어왔다. 맨 처음 살펴볼 것은 바로 “나는 생각한다”와 “나는 존재한다”라는 두 명제의 본성을 통한 비판이다. 이것은 삼단 논증의 제1명제와 결론명제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와 같은 제2명제를 도출해 낼 수 있다. “사고를 소유한 어떠한 것이라도 존재한다” 이 명제는 스스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부정의 방법에 의해 부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는 이러한 형태의 명제는 모두 참이기 때문이다: “F를 소유한 것은 어떠한 것이든 존재한다.”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는 비판자들은 부정의 방법이 통하지 않는 명제가 추가적으로 더 존재한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 같다. 그러나 부정의 방법 안에서 사고의 소유자는 의심할 바 없이 그 방법을 사용하는 성찰자일 수밖엔 없다. 헌데 데카르트는 이런 식으로 방어하려 들지 않는 것 같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 그는 실제로 요구된 나머지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의해서만 비판에 반응할 것이다. 그러나 코기토를 부정하는 것 역시 삼단 논법으로 이뤄진 것이다. 아마도 좀 더 적절한 논쟁은 데카르트가 ‘나’라고 지칭한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버나드 윌리엄 의 논문 <데카르트, 순수 학을 위한 기획>은 이 문제의 역사와 그에 대한 평가를 다루고 있다. 그 주된 목적은 게오르크 리히텐베르크에 의한 평가대로 사고하는 실재를 뒷받침하는 것이라기보단 데카르트는 다만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는 것에 있다: “어떠한 사고가 행해지고 있다.” 즉 코기토의 힘이 어떠하든지 데카르트는 거기서부터 너무 많은 것을 뽑아냈다는 것이다: 사유하는 것의 존재, 즉 “나”로 지칭되는 것을 코기토가 정당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데카르트의 이 몸과 마음을 분리하여 마음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우월을 두며 이원론에 빠진 것이 서양의학의 축복이 되었다. 즉 전통적으로 서양에서는 몸도 하나님이 만든 종교적 사상으로 몸에 대해서 해부학 실습을 하거나 수술을 하거나 함부로 손대는 것이 금기되었는데 몸과 마음이 따로 노니 몸에 대해서 마음껏 인위적인 행위를 하게 된 것이다. 서양의학에 대해 천박한 예를 들자면 창녀에 대해 마음의 문제는 우주 밖에 던지고 내 돈을 주고 내가 몸을 샀으니 네 육체를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남자의 논리와 유사하다. 낮에 멀쩡한 정신으로는 고상한척하면서 밤이 되면 마음과 몸이 따로 노는 개차반이 되는 어르신네들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즉 데카르트는 개를 시계처럼 기계로 보고 개는 생각을 못하니 개의 배를 마음껏 걷어찼다는 일화가 있는데[사실 개도 변연계가 발달했으니 감정은 있다] 이런 인체를 경시하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서양의학사를 지배해왔고 발달시켜왔다. 동양에서는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보니 몸을 함부로 건드리는 것이 금기였다. 또한 19세기 들어와서 수술법과 마취가 발달하니 그야말로 서양의학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게 되어 21세기에 모든 의학을 미신으로 치부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하지만 필자는 한방 피부과 전문의이며 한의사로써 서양의학이 치료해내지 못하는 흉터치료를 많이 치료한다. 필자가 하는 흉터치료는 보통 3차 대형병원,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일류 대학병원에서 흉터 치료를 포기한 환자이거나 그들 병원에서 수술이후에 흉터가 만들어진 이후 이미지한의원에서 수술후 흉터침 치료를 받는다. 사실 데카르트처럼 생각하면 몸은 생각에 대해서 부차적인 것이므로 치료의 대상이 아닐 수 있고, 불교적으로 생각하면 몸이란 지, 수, 화, 풍이 잠깐 모인 것이니 흉터나 모양에 집착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을 할수도 있다. 필자는 ‘나란 존재는 없다[無我]. 단지 나[ego]는 끊임없이 생성 소멸을 반복하며 우주적인 큰 나[참나, 眞我]가 내 몸속에 깃들어 있을 뿐이다’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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